돼지는 넘어져야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다.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면 어떤 것이든 제대로 볼 수 없다. 돼지에 대한 편견은 지저분하고 먹을 것만 밝힌다는 것이다. 그런데 돼지가 그런 동물이 아니라니? 오히려 인간이 그 깨끗한 돼지를 가장 지저분한 동물로 만들어 버렸다. 가두고 사육하면서 좋은 환경을 주지 않아 돼지는 냄새가 나는 동물이 되고 만 것이다.
나쁜 엄마 드라마의 시작은 돼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잘 못 알았던 돼지에 대한 선입견을 깬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생에 대한 또 하나의 교훈을 던져준다. 나는 언제나 이런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주는 교훈이 좋다. 고맙다.
[나쁜 엄마 내레이션 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동물이 있어 그게 뭔지 아니? 사람 그리고 돼지. 돼지 하면 모두가 더럽고 냄새나는 동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돼지는 똥오줌도 한 자리에서만 누고 잠도 깨끗한데서만 자. 체온을 낮추고 벌레를 떼 내려고 진흙 목욕도 자주 하고 말이야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돼지를 좁은 우리에 억지로 가둬 놓은 거지. 결국 진흙으로 목욕을 할 수 없게 된 돼지는 자신의 똥과 오줌에 몸을 비비게 됐고 점점 더 더러워지고 난폭하게 변해간 거야. 참 가엾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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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진짜 가여운 건 말야. 돼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항상 땅만 보며 살아야 한다는 거야. 오직 돼지가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 그건 바로 넘어지는 거지. 넘어져 봐야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거야. 돼지도 우리 사람도.
돼지가 깨끗한 동물이었지만 인간이 갇힌 우리에서 자기의 똥오줌에 몸을 비비며 살아가 지저분해진다. 인간이 그 돼지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참 불쌍하다. 그런데 그게 진짜 불쌍한게 아니라 돼지는 하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땅만 보며 사는 것이 얼마나 답답할까?
마치 이런 말처럼 들린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희망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언제나 문제와 걱정으로만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쌍한가? 사람들은 절망을 싫어한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순간이라도 희망을 주는 말을 좋아한다.
성경에도 보면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조국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정하였다고 말한다. 너희들의 죄로 인하여 이제 다른 나라를 통해 멸망의 심판이 왔으니 그것을 받아들이고 항복해야 한다. 사람들은 매국노라고 비난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가족들에게도 친한 친구들에게도 비난받았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말들을 싫어한다. 희망이 없는 말들 말이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 없다면 온 몸의 냄새가 나는 것보다 더 불쌍한 삶이다. 그런데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가? 보니 넘어질 때 온다는 것이다. 돼지가 넘어져서 뒤집어 지면 그제야 하늘을 볼 수 있듯이 사람은 넘어지는 순간에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 인사이트 있는 말이다. 넘어지는 것은 실패를 말하기도 하고, 무너진 삶을 말하기도 한다. 비참한 것도 말하고 소망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희망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인가? 넘어져 본 사람이야 말로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인가? 곰곰이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무엇이든 도전하고 시작해본 사람이 성공한다. 그런데 한번에 어찌 이루랴.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그때 희망을 본다는 것이다.
넘어지는 것도 잘해야 한다. 넘어져서 절망속에 더 큰 절망이 아니라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보는 것이 달라져야 한다. 드라마의 대사 속에서도 말한다. "우리 강호가 7살처럼 된 것은 하늘이 주신 기회야" 넘어져도 하늘이 주신 기회임을 잊지 않고 희망을 보며 살아가보게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