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본다고 정말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받는다. 정말 하나님이 계시다면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자!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보여줄 수가 없다. 믿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계시다고 믿는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나의 마음에도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 속에도 계시다고 믿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렇다. 보이는 것을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보이는 것에 무슨 믿음이 필요한가?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실체를 믿을 때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고 표현한다. 즉,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로 계시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이런 부분도 한번 설명해 보고 싶다. 여기서는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라는 책 속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질문하는 설정이다. 좀 더 내용을 드려다 보면 설정이 참 재미있다.
평범한 삶을 살던 닉코민스키라는 사람에게 어느날 초대장이 오게 된다. 그 초대는 저녁식사의 초대인데 보낸이가 예수라는 것이다. 누가 장난을 친 것이라 생각하고 가지 않을까 하다가 장난으로 온 초대장에 자신도 장난 삼아 응하게 된다. 그런데 그 초대받은 자리에 자신을 배웅하고 함께 하는 사람이 가짜 예수가 아니라 실제 예수라는 설정이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만약 실제로 예수님이 내 앞에 계시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은가? 어떤 말을 진짜로 하고 싶은가? 책 속이 여러 장면중에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기적을 보여주면 쉽게 될 일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런 기적을 보고도 안 믿을 수 있을까요?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께서 대답하신다.
(생각나는 대로 제가 풀어쓴 것입니다.)
제가 기적을 보여준다고 과연 사람들이 믿을까요? 제가 기적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더군요. 광야에서 굶어 죽지 않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고기가 없다고 불평하더군요. 광야에서 아무리 살아도 옷이 해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돌보아 주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돌보아 주었냐며 원망하더군요.
무엇을 말하는지 보이는가? 하나님은 기적을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넘치도록 보여주신 적이 있다. 생각해보라. 내 눈 앞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면 더 이상 무슨 기적을 바라겠는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사건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죽은 자를 살렸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려내었다. 무슨 기적이 더 필요한 것인가?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오병이어(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로 그 사람들을 다 먹였다.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이 등장한다. 그런데 무엇을 더 보여주어야 하는가? 신기하게도 기적을 보여주면 잘 믿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더욱 완고해졌다. 당연하게 생각하고 더 많은 요구를 하는 것이다.
기적을 본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검증이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지금이라도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본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하신다. 자신이 부활한 후에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나타나 나를 만지고 믿어라. 그렇게 믿음을 고백하자 (요20:29)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기적을 본다고 더 믿음이 커지는 것도 아니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고난이 어려움이 그분을 만나는 가장 좋은 길이다. 고난은 축복의 통로라는 말이 이런 의미이지 않을까? 기적을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잔잔하게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